인도·유럽어족 이야기 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 이탈리아어파와 켈트어파

화자 수가 5천만 명을 넘는 언어 28개 중 여섯 개가 서유럽 언어입니다. 지난날의 식민 지배 역사를 보여주는 통계죠. 그중 네 개, 즉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는 로맨스(로망)어군Romance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들입니다. 로맨틱한 언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마와는 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언어들은 공통 조어의 기록이 남아 있는 희귀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전부 라틴어Latin에서 갈라져 나온 언어들이거든요.

라틴어가 ‘세계의 공용어’가 되기까지

오늘날 라틴어는 일상 생활에서 구사하는 화자가 없는 죽은 언어, 즉 사어dead language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사 때 라틴어를 사용하니 전례 언어liturgical language, 혹은 생물의 학명 등에 쓰이니 학술적인 세계 공용어lingua franca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때는 라틴어가 정말 세계 공용어로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는 라틴어도 어느 민족이 사용하던 소규모 언어에 불과했습니다. 로마가 처음 세워지던 때로 돌아가봅시다. 역사에 도무지 흥미가 없다면 다음 절로 넘어가도 좋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로 시작했습니다. 왕이 있었고, 귀족도 있었고, 평민도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라틴어와 같은 이탈리아어파Italic languages의 오스크어Oscan나 움브리아어Umbrian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인도·유럽어족의 또 다른 어파인 켈트어파Celtic languages 언어 사용자들, 기원을 알 수 없는 에트루리아어Etruscan 화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주위 도시들에 대해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며 성장했고,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정복 활동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통일했습니다. 알프스 산맥 북쪽(여기를 ‘갈리아’라고 불렀습니다)의 켈트 부족들이나 바다 건너 에페이로스의 퓌로스 왕의 침략도 잘 막아냈습니다. 참으로 착실한 성장과정이 아닐 수 없지만, 세계 제국이 되기엔 좀 부족합니다. 이때의 라틴어는 상고 라틴어Old Latin라 부르며 비문 등으로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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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라틴어로 적힌 포룸 비문. 당시 흔하던 좌우교대서법boustrophedon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것은 세 차례의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의 도시 국가 카르타고Carthage와 맞붙어 이긴 것이죠. 한니발이라는 불후의 명장을 상대로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카르타고를 지도상에서 아예 지워버렸습니다. 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의 카르타고어Punic에 대한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 라틴어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장악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는 문화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혼란했던 그리스와 발칸 반도를 정복합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가 옵니다. 삼두 정치를 함께한 폼페이우스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카이사르 자신은 각각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 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와 브리탄니아를 로마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카이사르는 원정 후 로마에 돌아와 암살당하고,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꺾고 이집트를 손에 넣으며 공화정을 끝내버립니다. 기원전 27년 스스로 ‘가장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올라 로마를 진정한 제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는 당시에 알려진 세계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고, 라틴어는 이 제국의 공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가히 ‘세계 공용어’라 할 만 하죠. 또 그리스를 대신해 몇 백 년 간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로 번영한 로마는 라틴어의 위상을 ‘고급 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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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황제 사후 로마 제국의 최대 영역을 나타낸 지도. 바깥의 글씨는 이민족 이름들입니다.

로마 제국의 유산, 로맨스어군

역사 속 어느 국가나 그렇듯 최후는 찾아왔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정치 불안과 부패, 외부적으로는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합니다. 사실 이미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은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어파Germanic languages의 다양한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지역별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 조각조각 흩어졌습니다. 지금의 포르투갈에는 수에비 왕국, 스페인에는 서고트 왕국, 프랑스와 독일에는 프랑크 왕국, 이탈리아에는 동고트 왕국이 들어선 식으로요. 물론 지배층만 바뀌었다 뿐이지 민중들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는 라틴어였습니다. 정확히는 좀 대중적이고 토착 언어들의 영향을 받은 속라틴어Vulgar Latin입니다. 이 속라틴어가 바로 로맨스어군 언어들의 기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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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의 로맨스어군 언어들의 분포. 색깔의 차이를 통해 각 언어들의 유사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 이후로는 각 지역의 로맨스어가 독자적인 언어로 발전했고, 예전의 그 교양 있는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Classical Latin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한문과 현대 중국어 방언들의 관계가 고전 라틴어와 로맨스어군 언어들의 관계와 거의 동일합니다. 고전 라틴어는 꽤 복잡한 언어입니다. 명사에는 세 가지 성(남성, 여성, 중성)과 두 가지 수(단수, 복수) 그리고 예닐곱 가지 문법적 격이 있어 각각의 범주에 맞게 명사의 형태가 변화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어와 같은 관사가 없다는 점입니다. 동사 역시 주어의 인칭(1, 2, 3인칭)과 수(단수, 복수), 세 가지 시제(현재, 과거, 미래)와 두 가지 상(완료상, 미완료상), 세 가지 서법(직설법, 가정법, 명령법)과 다섯 가지 비정형 형태, 두 가지 태(능동태, 수동태)까지 수많은 범주에 따라 굴절합니다. 이를 다 조합하면 동사 하나가 수백 가지가 넘는 형태를 갖는 셈입니다. 이에 더해 명사와 동사의 굴절은 한 가지 패턴만 있는 것이 아니니 암기를 싫어한다면 악몽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어 하나에 표시되는 정보가 많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전 라틴어는 어순이 꽤 자유로운 편입니다. 너무 자유분방해서 단어들이 읽기 힘들 정도로 뒤섞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로맨스어들은 격 표지와 중성 명사를 버렸습니다. 단어의 형태를 일일이 외우는 수고는 줄었지만, 대신 어순이 ‘주어가 동사한다 목적어를’로 고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관사와 부정관사도 모두 사용하고요. 동사의 경우에는 라틴어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복잡한 굴절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를 제외하면 대부분 동사 어미로 주어의 인칭과 수를 파악할 수 있어 주격 인칭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 것도 특징입니다.

조금 예외적인 사례는 루마니아어Romanian입니다. 지리상으로도 옛 동로마 영토에 위치하고, 계통상으로도 동로맨스어로 분류됩니다. 루마니아어 명사에는 중성과 세 가지 격이 존재합니다. 또 정관사가 단어 뒤에 접미되는 발칸 반도 언어권의 특징을 보입니다. 어휘적으로도 이웃한 슬라브어에서 온 차용어가 많습니다. 로맨스어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에는 스위스의 로만시어Romansh, 프랑스 남부의 옥시탄어Occitan 혹은 오크어langue d’oc, 시칠리아 섬의 시칠리아어Sicilian 등이 있습니다.

바다 건너 도망친 켈트어

한때 로마를 위협하던 켈트인들은 로마가 강성하자 굴복하거나 물러나야 했습니다. 켈트인은 한때 오늘날의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 중앙 유럽과 아나톨리아 반도(!) 일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이 앞서 살펴봤듯 로마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켈트인들은 로마에 동화되거나 패퇴하여 로마군이 닿지 못하는 오지로 점점 들어갔습니다. 결국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살던 켈트인의 언어는 모두 사멸하고, 바다와 산맥으로 막힌 영국과 아일랜드의 켈트어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의 어군을 대륙 켈트어Continental Celtic, 뒤의 어군을 도서 켈트어Insular Celtic이라고 부릅니다. 이 분류가 계통적인 것인지 언어 동조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도서 켈트어는 다시 고이델어Goidelic languages와 브리톤어Brittonic languages로 나뉩니다. 인도·유럽 조어의 *kʷ 소리가 고이델어에서는 k, 브리톤어에서는 p로 대응되기 때문에 각각 Q-켈트어와 P-켈트어라고도 합니다. 고이델어는 오늘날 아일랜드(초록)와 스코틀랜드(파랑)의 게일어Gaelic,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한 맨 섬에서 사용하는 맹크스어Manx(주황)가 속하며, 브리톤어에는 영국 남서부의 웨일즈어Welsh(빨강)와 콘월어Cornish(노랑), 프랑스의 브르타뉴어Breton(검정)가 들어갑니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영어와 프랑스어에 밀려 켈트어는 대다수가 사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나마 오늘날 민족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아일랜드어를 시작으로 공식어 지정 및 부흥 운동이 이루어지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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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명맥을 유지한 켈트어파 언어들.

켈트어의 위상과는 별개로 언어 자체의 특징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우선 기본 어순이 ‘동사한다 주어가 목적어를’이라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웃한 대서양 언어권의 언어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독특한 어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켈트족의 저항의 역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이델어의 경우 자음은 대체로 구개음화palatalization된 계열과 아닌 계열로 나뉘며, 브리톤어인 웨일즈어는 비음과 유음에까지 유성-무성 대립이 존재하는 특이한 언어입니다. 도서 켈트어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단어의 문법적 환경에 따라서 첫 자음이 비음화되거나, 유성음화되거나, 무성음화되거나, 마찰음화되거나, 아예 탈락하는 등의 자음 변이consonant mutation와, 인칭에 따라 굴절하는 전치사 등이 있습니다.

어떤 건지 감이 잘 안 온다면 아일랜드어로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표현을 배워봅시다. Is maith liom thú인데요, 직역하면 ‘있다 좋음 나에게 너’입니다. 여기서 liom이 바로 le라는 전치사의 1인칭 단수 형태이고, thú [huː]는 2인칭 단수 접속형 대명사 tú [t̪ˠuː]가 자음 변이된 단속형 대명사랍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로마 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두 북방 민족, 게르만과 슬라브의 언어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작성 양재영 감수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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